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제가 최근에 본 유튜브 영상을 바탕으로 도널드 트럼프의 삶과 그가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이 영상은 트럼프의 대통령 시절보다는 그 이전의 삶, 즉 어떻게 '도널드'가 '트럼프'라는 브랜드가 되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었어요.
처음 영상을 보면서 가장 놀란 점은 트럼프의 삶이 정말 롤러코스터 같다는 거였어요. 엄청난 성공과 실패를 오가며, 항상 자신의 이름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여정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그가 어떻게 부동산 재벌에서 TV 스타를 거쳐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는지, 그 과정이 마치 영화처럼 극적이었거든요.
트럼프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의 영향
도널드 트럼프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는 뉴욕에서 가장 큰 부동산 회사 중 하나를 운영했죠. 프레드는 대공황 시기에 거의 파산할 뻔했지만, 뉴욕 최초의 현대식 셀프서비스 슈퍼마켓을 건설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올렸어요. 이 돈으로 파산 직전의 부동산 회사 자회사를 싼값에 인수했고, 그곳에서 얻은 부동산들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큰 돈을 벌었죠.
도널드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23개의 방이 있는 집에서 자랐고, 가족 전용 운전기사가 그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어요. 하지만 프레드는 자녀들에게 성공을 물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냉혹함도 가르쳤죠. 도널드의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라, 약해지지 마라, 승자가 되어라"라는 조언을 했고, 도널드는 이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군사 학교 시절
어린 도널드는 학교에서 급우들을 괴롭히고 심지어 어린 동생까지 괴롭혔어요. 한번은 선생님에게 지우개를 던지기도 했죠.
이에 아버지 프레드는 즉시 조치를 취해 도널드를 뉴욕 북부의 군사 기숙학교로 보냈습니다.
부유한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도널드는 이 엄격한 환경에서 오히려 잘 적응했어요. 여러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고학년 때는 주장으로 선정되었죠. 졸업 앨범에는 '여성들의 사나이'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도널드는 기숙학교 시절이 비즈니스와 정치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규율을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어요.
출처: 나무위키
The Trump Organization 탄생과 초기 사업
대학 졸업 후 처음 몇 년은 화려하지 않았어요. 도널드와 프레드는 손을 걷어붙이고 돈을 잃고 있던 몇몇 주택 프로젝트를 되살려야 했죠. 도널드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많은 특권을 가지고 태어났더라도 여전히 성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요.
3년간의 견습 기간 후, 도널드는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지휘권이 넘어간 거죠. 그의 첫 번째 움직임 중 하나는 회사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어요. 'E. 트럼프 앤 선즈'는 낡고 구식으로 들렸죠. 젊고 역동적인 기업가가 이끄는 현대적인 부동산 회사에는 화려한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트럼프는 회사 이름을 ' The Trump Organization '으로 바꿨어요. 이것은 도널드에서 트럼프로 변모하는 초기 단계였습니다.
트럼프는 맨해튼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아파트로 이사했고, 보통 아름다운 여성을 팔에 끼고 맨해튼의 엘리트 나이트클럽에 가기 시작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저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트럼프는 일하고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상품, 바로 자기 자신을 마케팅하고 있었던 거죠.
첫 번째 법적 분쟁과 로이 콘과의 만남
1970년대 초, 트럼프는 뉴욕 타임스에 처음으로 등장했어요. 헤드라인은 "흑인 차별 혐의"였습니다. 이 기사는 도널드 트럼프와 그의 아버지를 상대로 제기된 법무부 소송에 관한 것이었어요. 'The Trump Organization'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차별했다는 혐의였죠.
트럼프의 변호사들은 합의하라고 조언했지만, 그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트럼프는 1970년대 초 맨해튼의 화려한 나이트클럽에서 변호사 로이 콘을 만났습니다. 그는 로이 콘의 조력으로 법무부에 1억 달러의 반소를 제기했고,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최종 합의로 'The Trump Organization' 은 어떤 잘못도 인정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트럼프에게 승리였고, 그가 평생 간직할 교훈이었어요. 절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말라는 것이죠. 로이 콘은 15년 동안 도널드 트럼프의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맨해튼 부동산 시장 진출
펜 센트럴 철도가 파산하고 세 개의 주요 부동산 자산을 남겼는데, 바로 코모도어 호텔과 뉴욕 웨스트 사이드의 두 철도 부지였죠. 이 철도 부지는 맨해튼에 남아 있는 가장 큰 미개발 토지였어요. 트럼프는 이 자산들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자신이 독립적인 개발자로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개발 기관의 주요 관계자를 설득하고, 그 부지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설명하는 기자 회견을 열었으며, 아버지의 정치적 연줄 덕분에 시장과 직접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트럼프는 이러한 노력을 통해 그 부지들의 개발권을 획득했
트럼프는 코모도어를 그랜드 하얏트로 변모시켰고, 이는 매우 성공적인 호텔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개발권을 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버지의 돈과 인맥 덕분에 그 자리에 있다고 말하는 비평가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는 부족했고, 자신의 야망을 충족시키기에도 부족했죠.
1980년대 트럼프의 황금기
트럼프 타워의 건설은 도널드에서 트럼프로 변모하는 또 다른 큰 단계였어요.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콘크리트 건물이었고, 뉴욕의 스카이라인에 큰 추가물이 되었습니다. 그를 인정하지 않았던 신문과 잡지들은 이제 그의 성장을 다룰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토크쇼의 단골 게스트가 되었고, 진행자들은 그의 카리스마와 모든 종류의 주제에 대해 기꺼이 이야기하는 그를 좋아했습니다. 트럼프는 부동산 개발자에서 금융, 엔터테인먼트, 정치 세계를 연결하는 국가적 유명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트럼프가 원하지만 갖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웨스트 사이드 철도 야드였죠. 그 부지는 그의 아버지의 친구인 에이브 허쉬필드에게 넘어갔습니다. 재개발 계획이 승인되었지만, 허쉬필드는 프로젝트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어요. 그가 정부에 너무 많은 양보를 했기 때문이었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자금 조달을 방해했었기 때문이죠
허쉬필드가 결국 좌절하고 떠나자, 트럼프는 1985년 추수감사절 전 주에 자신의 계획을 발표했어요. 그 부지에 거의 8,000개의 아파트와 콘도, 그리고 약 600개의 미식축구장 크기의 TV 및 영화 스튜디오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었죠. 트럼프는 이것을 '텔레비전 시티'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였던 뉴욕 시장 에드 코치의 방해가 있었죠. 아이러니 하게도 에드 코치는 트럼프의 거울 이미지였죠. 두 사람 모두 같은 것을 원했어요. 뉴욕시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가 되길 원했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길 원했죠.
코치는 자신을 "이성을 갖춘 자유주의자"라고 묘사하는 민주당원이었어요. 그는 트럼프가 세금 혜택을 받으면서 뉴욕을 부유층의 놀이터로 만드는 방식을 경멸했지만, 트럼프와 다른 부유한 개발자들이 가져오는 세금 수입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죠. 한편 트럼프는 코치를 싫어했어요. "뉴욕시가 언젠가 다른 시장을 갖길 바란다. 그는 재앙이고 도시에 매우 나쁜 사람이었다"라고 말했죠.
두 사람은 이미 트럼프 타워의 세금 두고 긴 싸움을 벌였고, 텔레비전 시티는 다음 전장이 되었습니다. 트럼프는 코치와 지역 활동가들의 결합된 저항을 극복할 수 없어 텔레비전 시티의 꿈은 펼칠 수 없었습니다.
트럼프는 좌절감을 투기로 전환했어요. 파산한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사서 자신의 항공사인 '트럼프 셔틀'을 시작했고, 애틀랜틱 시티의 카지노 확장에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또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이라는 책을 출간했죠 트럼프의 삶, 경력, 비즈니스 전략에 관한 책이었고,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정치적 관심의 시작과 경제적 위기
트럼프는 TV에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미국 외교 정책을 비판하는 전면 광고 게재에 거의 10만 달러를 썼죠. 트럼프의 정치적 견해는 약함에 대한 두려움과 맨해튼 부동산의 제로섬 환경에 의해 형성되었어요. "이란에 대해 너무 약하게 행동하고 있다. 우리는 약함을 통해 결국 전쟁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죠. '거래의 기술'의 성공과 그의 정치적 발언에 대한 일부 지역의 긍정적인 반응 후, 트럼프는 대중이 그의 의견을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지만 포브스에 의해 밝혀진 보고서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빚더미에 빠졌다는 사실이 드러났어요. 트럼프에게는 타격이 컸죠. 트럼프는 자신의 '성공한 부자'라는 이미지를 그의 비즈니스에 전략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죠.
1990년대 위기와 재기
트럼프와 그의 사업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폭로는 절정기 트럼프의 끝과 그의 전체 경력에서 가장 힘든 시기의 시작을 알렸어요. 1980년대가 호황이었다면 1990년대는 붕괴였죠. 트럼프가 실행한 대부분의 기업 인수는 부채로 자금을 조달했고, 경제가 강세를 유지하는 한 그것은 반드시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1990년대 초, 미국 경제가 불황에 빠지면서 트럼프의 비지니스토 어려움에 빠졌죠. 1990년대 초, 트럼프는 30억 달러 이상의 부채를 지고 있었고 본인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요트, 항공사, 그랜드 하얏트 일부를 매각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 마를라 메이플스와의 불륜이 타블로이드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그의 결혼 생활도 붕괴되었습니다.
웨스트 사이드 철도 야드와의 마지막 만남과 재기
트럼프가 바닥을 쳤을 때, 그가 그토록 갈망해온 웨스트 사이드 철도 부지 프로젝트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어요. 결국 그는 개발권을 홍콩 사업가 컨소시엄에 판매했고, 이를 통해 개인 파산이라는 최악의 수모에서 자신을 구했죠. 이를 기점으로 역사적인 재기를 시작했습니다. 트럼프는 5년 만에 -9억 달러에서 +7억 달러의 순자산으로 회복했죠. 트럼프는 자신이 비록 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아직 이기지 않은 것뿐이라고 말하곤 했죠. 이것이 그의 철학이죠.
미스 유니버스와 TV 쇼 '어프렌티스'
트럼프는 자신이 재기를 알리기 위해 행동했죠. 그는 미스 유니버스, 미스 USA, 미스 틴 USA 대회와 같은 고프로필 자산에 돈을 쏟아붓기 시작했고, 월 스트리트에 있는 70층 건물도 구입하고 빌딩의 이름이 '트럼프 빌딩'으로 명명했죠. 그는 '재기의 기술'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는 그가 돌아왔고 어려운 시기에 그를 버린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책 길이의 발표였죠.
2001년 9/11 테러 공격 6개월 후, 마크 버넷이라는 '서바이버'라는 프라임 타임 TV 쇼 진행을 트럼프에 제안했고 이 쇼는 매주 평균 2천만 명 이상의 시청자를 끌어모았죠. 트럼프는 진짜 TV 스타가 되었습니다.
정치적 야망의 성장과 버서 운동
'어프렌티스'는 트럼프에게 일어난 최고의 일 중 하나였어요. 14시즌 동안 진행자로 있으면서 트럼프는 급여, 라이선싱 및 기타 잔여물에서 약 5억 달러를 벌었고, 이는 그의 평판에 큰 영향을 주었죠. '어프렌티스'는 트럼프가 자신의 명성을 판매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시켰죠. 결국 기회를 포착하고 히트 TV 쇼를 통해 스타가 된 다음, 향수, 보드 게임, 책, 정장 등의 사업을 통해 큰 수익을 얻었죠.
2009년, 트럼프는 그의 최신 책 '챔피언처럼 생각하기'를 출간하려고 했어요. 미국은 두 가지 측면에서 큰 격변에 직면하고 있었죠. 투자 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붕괴는 전면적인 금융 붕괴와 불황을 촉발했고, 몇 달 후 미국은 최초의 비백인 대통령을 선출했어요. 이 두 가지 지진 같은 사건의 조합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정치를 변화시키고 있었죠.
2010년, 그는 금융 위기에 관한 다큐멘터리 감독인 스티브 배넌을 소개받았어요. 배넌은 보수 정치의 진화의 축소판이었죠. 두 사람은 중국이 어떻게 미국을 이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2012년 대선 출마 고려와 버서 운동
2011년 초, 트럼프는 CPAC(보수 정치 행동 회의)라는 고프로필 공화당 회의에서 연설했어요. 그는 '머니 머니 머니'라는 노래에 맞춰 등장했고, 공화당 후보들을 패자라고 불렀습니다. 또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기업가인지 대해 언론 기사를 인용해 강조했죠. 또 오바마케어를 폐지하겠다고 약속했죠. 또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버서' 운동을 주도했어요. 이 주장으로 트럼프는 2012년 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 초기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출생증명서를 공개하면서 경선에서 물러났죠.

2016년 대선 출마와 승리
2016년 6월 16일, 도널드 트럼프는 아내 멜라니아와 함께 트럼프 타워의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며 닐 영의 '로킹 인 더 프리 월드'가 재생되는 가운데 세상을 바꿨어요.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공식적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며, 우리는 우리나라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는 연설을 시작하며 미국이 더 이상 승리가 없다고 한탄했어요. 국가는 모든 사람의 문제를 위한 덤핑장이 되었고, 수십억 달러가 해외 전쟁에 지출되었지만 죽거나 부상당한 군인들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었죠. 경제는 약했고 오바마케어와 중국이나 멕시코와 같은 곳으로 일자리를 오프쇼어링하는 무역 거래로 인해 더 약해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공화당원들은 국가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진지하지 않았다고 비판했습니다.
주류 언론은 트럼프의 연설을 대부분 농담으로 취급했어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출마에 진지하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지만 그의 캠페인은 농담이 아니었어요. 사실 트럼프는 몇 달 동안 이를 계획하고 있었죠. 그는 스태프를 고용하고 스톤과 배넌과 같은 사람들을 가까이 두었어요.
대선 승리와 그 의미
2016년 공화당 예비 선거는 트럼프 쇼가 되었어요. 그는 정치를 꼭 봐야 하는 TV로 바꿨고, 유권자들은 그것을 사랑했죠. 트럼프는 빠르게 여론 조사에서 1위로 올랐고, 비록 사적으로는 그가 거기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의 캠페인은 계속해서 모멘텀을 모았어요.
트럼프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실제로 테드 크루즈에 이어 2위를 차지했어요. 많은 사람들, 특히 대부분의 주류 언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분명히 그들은 광기가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른들이 곧 장악할 것이라고요. 하지만 트럼프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어요. 그는 뉴햄프셔, 네바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이겼습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사람들의 4분의 1 이상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주였죠. 공화당 전당 대회가 다가오면서 트럼프는 대의원 수에서 큰 리드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는 56개의 예비 선거 경선 중 41개를 이겼죠. 결국 그는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과 맞서 출마할 공화당 후보가 되었죠.

대선 캠페인의 극적인 순간들
사람들은 클린턴이 11월에 꽤 쉽게 이길 것으로 예상했어요. 기득권 세력들은 그녀가 이기기를 원했죠.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어요. 클린턴의 캠페인은 해킹되었고 선거 캠페인 의장 존 포데스타에게 보내고 받은 수천 개의 개인 이메일에 대한 혐의가 부각되었죠
유출된 이메일에서 주요 민주당원들이 버니 샌더스를 어떻게 약화시킬지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공화당은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이었을 때 사설 이메일 서버를 사용한 것에 대해 민주당의 엉성한 정보 보안 인식과 행동을 선거 이슈로 만들려고 노력해왔죠.
그러나 트럼프에게도 약점이 있었죠. 선거 한 달 전, 워싱턴 포스트는 트럼프가 TV 쇼 '액세스 할리우드'의 진행자와 나눈 영상을 발표했습니다. 그 영상에서 트럼프는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죠

대선 승리와 트럼프의 변화
트럼프는 처음으로 사과했죠. 캠페인은 잠시 폐쇄되었고,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트럼프에게 사퇴하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는 그런 일을 할 의도가 전혀 없었죠. 대신 그는 반격을 계획했어요.
도널드 트럼프가 빌 클린턴을 성폭행으로 고발한 여성들과 함께 두 번째 대통령 토론 전에 나타나기로 한 결정했죠. 이 전술은 효과가 있었어요. 액세스 할리우드 테이프 대신, 사람들은 트럼프의 대담함과 빌 클린턴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선거일 밤, 트럼프는 이길 것 같지 않았죠. 그러나 의외의 역사가 만들어졌어요. 트럼프는 거의 3백만 표 적은 총 표를 얻었지만, 필요한 주에서 이겼고 믿을 수 없는 역전승을 이루어냈어요.

트럼프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대통령에 출마했을까요? 그냥 트윗이나하고 '어프렌티스'를 계속하는 것이 더 쉽지 않았을까요? 그 대답은 트럼프가 항상 사람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에요. 그 대상은 그의 아버지와 같이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겠지만, 그를 존중하지 않았던 주류 언론, 정치 경제 기득권 세력 그리고 1990년대에 그가 바닥에 있을 때 그를 버린 사람들과 같은 비평가들이죠
트럼프는 2011년 백악관 특파원 만찬에서 버락 오바마에 의해 굴욕을 당한 후 대통령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직책을 차지함으로써 모든 엘리트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무엇이 있었을까요?